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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포항예술인한마당-"화사한 문화"展 문학작품

화사한문화 작가매칭표001.jpg

2020포항예술인한마당 전시부분 특별전
<화사환 문화>전 문인협회 작가 작품 입니다.
 

미술협회에서 열 여섯분, 사진작가협회에서 열 다섯분. 31편 모두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번거로울 수도 있을 전시회 콘셉트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하게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전체 31작품 게시 하오니 각각의 작품화과정에 충분히 참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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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오는 날에

사람들은 모두가 우산을 펴드는데
나는 문득 접어둔 그대를 펴 들었다
추억 속 아린 그리움에 빗금 치며 오는 비

 


2.

요즘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건, 예쁜 꽃이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온몸을 중무장한 채, 용광로 앞에서 땀으로 범벅된 노동자의 거친 모습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배워가고 있다. 잘 다듬어진 매무새 보다, 꾸며지지 않는 민낯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수필 <아름다운 모습> 중에서  

 


3. 아부지의 바다

웃방 아부지
밤새 쿨럭이시더니
동트기도 전에 물에 나가신다

어제처럼
한 개비 피워 물고 물길을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신다
먼바다를 달려온 파도가 추근대는
영일만 복판에
구름보다 가벼운 아부지
'종지 안 촛불 인양 흔들린다'

바다보다 더 짙푸르게
채색된 아부지 삶이 넘실대며
드나든다.

 


4.

부사도, 형용사도 손에서 내려놓는다.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삶을 살 때가 되었다. 
잘 익은 바람이 곁을 지나는 날이면 젖은 마음도 꺼내 말려서 생을 마감할 때는
한 줌 바람처럼 가벼웠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몇 개의 동사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먹다, 살다, 보내다, 바라보다. 깊어지다 같은…….                                  
                                                   수필 「말의 집」 중에서

 


5.

길과 길들이 이어진 풍경들은 일상에서 벗어난 나를 또 다른 공간에 머물게 한다.
익숙한 장소지만 낯선 곳에 머무는 듯, 늘 새로운 풍경들을 만난다.
걷다보면 지나간 하루의 일상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찰나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고 아쉬움은 다시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직선으로 뻗은 길에 소실점이 보이지만, 길 끝은 언제나 열려있다.
현재의 시간을 걸으면서 다가올 내일의 시간으로 향한다.

수필<길에서 안부를 묻다>중에서

 

 

6. 걱정지우개

사랑하는 여러분
얼굴 들어 보세요
활짝 웃어 보세요
무슨 걱정 있으신가요
걱정 걱정 지워 드릴께요
걱정지우개로
쓱쓱 싹싹 쓰으윽 싸아악

 


7.

 이윽고, 서출지書出池에 이르자 이요정二樂亭은 텅 비어 있고,
못 둑에는 백일홍이 짙붉게 피어나 있었습니다.
보름달처럼 둥근 못에는 만개하여 풍염한 연꽃송이, 채 피지 않은
합장한 모양의 꽃봉오리들이 둥글고 넓적한 연잎 위로 점점이 곧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짙은 향기가 청풍에 묻어났습니다. 둥근 연잎마다 새맑은 수정구슬처럼 방울방울 맺혀 있었습니다.
고려 말의 유종儒宗, 목은牧隱 선생이 벗인 나잔자懶殘子 스님을 찾아가며
빗속에서 읊은 시 한 머리가 제 마음에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습니다.    

<옥룡암 기행> 중에서

 


8. 부조역 기차소리

새우젓 냄새 짭쪼롬 묻어있는 부조 간이역
할매 또아리 깔고 앉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양동 마을 모퉁이 허무는 기적 소리 들리면
일어서는 무릎에서 신음이 따라 일어선다
은행잎 요란하게 흩어 놓고 기차는 지나가고
다시 앉아 이야기 이어지는 간이역
날마다 온다던 엄니의 기차는 멀어지고
난 쑥부쟁이 같은 이야기를 듣네
흰 머리카락 나풀거리는 오후
나도 기차를 타고 싶네

 


9. 지는 꽃

한나절 사월 꽃은 지기 위해 피었던가
연분홍 저 허공이 통째로 무너진다
내 사랑,
귀엣말처럼 왔다가
천둥처럼 가고 있다

 

 

10. 紅桃(홍도)

염천 蘭月에
사월의 순정
도화살로 익었네
이 놀라운 섭리!

 


11.

   인생은 만남이다.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 여운이 남는 사람이 있다. 잊히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
내 삶에도 한 가닥 뚜렷한 길이 나타난다.
나도 누군가의 기억에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수필 <아름다운 사람> 중에서


12. 홍두견 꽃길

명주 실타래 감아 올리는 실폭담높은 벼랑위에 매듭진 꽃 한 올바람이 살폿 잘라다 
두견주 담고그리움 한 잔미움 한 잔사랑 한 잔으로두견새 취하도록 인연을 털때
그녀와 나란히 발 담그고조물조물 무친 미후리 순과막걸리 한 사발에꽃잎 다 지도록
그 생 또한 다 가는지 몰랐다 꽃길로 꽃길로만 가라던우리 오래된 이야기를 
이렇게 뿌려도 되는건지 굽이굽이 애틋한 사람 진분홍 소풍길에 다시 만날 수있을까 

 

 

13.육수

  똥을 뺀 멸치의 배가 홀쭉하다. 잘 건조된 듯하지만 바다에서 한 생을 보낸 몸에서는
채 마르지 않은 비릿한 바다의 흔적이 묻어난다.  온 몸이 허물어지도록 우려져야 끝이 나는 생애에도
저 마다의 억울함이 있다. 온갖 수모를 겪은 멸치는 은빛 비늘은 빛을 잃었고 존재감도 사라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고통이 없으면 육수는 깊은 맛을 내지 않는다.
소박한 국물의 맛 하나에도 순교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살이 뭉개지고 뼈가 어스러진 잔해를 본다. 속을 우려 낸 고단한 몸부림의 흔적이다.
좁은 솥 안에서 낯설지 않은 또 하나의 세상을 마주한다.
시인 신달자는 멸치국물을‘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의 몸 섞임이다.
서로 뒤틀리거나 배배꼬여서 증오를 다 삭이고 난 뒤에야 찾아오는 고요의 맛’이라고 표현했다.
   상처를 주기도하고 때로는 받기도하는 것이 삶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이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로를 보듬고 참 맛을 낸다. 느릿느릿 허물어지면서 자신을 버릴 때
비로소 맛을 낸다. 바다의 비릿한 물냄새와 들판의 투박한 흙내음이 어우러져 서로의 몸을 섞는다.
바다는 들판의 바람을 따라 살을 부비고 들판은 바다의 출렁임에 기대며 제 몸을 내어준다.
소용돌이가 멈춘 고요함이 지나간 흔적들을 어루만진다. 뼈저린 고통을 감내한 그 진한 육수의 인내에
상처받은 삶들이 위로 받는다.
  국물이 입안을 맴돈다. 유년의 기억에 남아있던 낯익은 냄새가 온 몸으로 스며든다.
상주들의 낮은 곡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어우러지던 그 이율배반적인 맛이다.
삶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는다. 하얗게 서리 내려 얼었던 마음이 육수에 녹아내린다.
  깊고 진한 향기는 내 삶에 온기가 되고, 분노와 증오를 다 삭인 그 맛의 역사는 한편의 서정시가 된다.

 


14.

  독도라는 무대 위에서 하늘과 바람과 바다가 빚어내는 모노드라마 같은 풍경을 한없이 흠모한다.
섬이 나를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품는다.
  서도로 기우는 해가 마지막 자태를 뽐내며 불덩이를 뱉는다. 저녁을 맞이하는 생명 있는 것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바다도 출렁 몸을 뒤척여 허연 소금물을 길어 올려 흩뿌리며 검푸르게 가라앉는다.
           
                                           수필 「등대 일지」 중에서

 

15. 구두

너의 발등에 올라 깍지를 끼면
스무 개의 발가락은 춤을 춘다
너는 나에게 얼마나 특별했던가
지금은 빛이 나고 싶은 계절
매일 매일 닦으면
보통의 끝에 닿을 수 있을까

 


16. 우아한 테라스

  난간에 매달린 제라늄과 라벤더를 배경으로 선글라스 일곱이 색색 꽃으로 둘러앉았는데
자질구레한 다반사가 잔웃음 어우러진 턱을 괴고 지성의 무게를 재는데 칠월을 담금질하는
빙설그릇 남겨진 오색 젤리의 수를 세는데 원피스 자락에 나풀대는 파도소리와 프랑스풍
카페테라스의 우아한 시간이 인증샷 날리는데 소싯적 로맨틱을 뒤적이면
아득히 접혔던 연애가 비눗방울처럼 피어오르는데 무게 다른 외로움 변곡선을 그리는데
열 손톱에 피운 눈꽃 언제쯤 녹을까 모자라는 참을성이 하품을 쏟는데 초조해진 곁눈질

  17시 방향으로 해가 기운다

 


17. 화장터에서

삶은 바람 같은 것
삶은 먼지 같은 것
삶은 연기 같은 것

살아 있을 때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죽어서 피어나는
저 불꽃은 소용이 없다

 


18. 사흘

아카시 꽃이 피고
아카시 꽃이 시드는 시간
그녀가
애써 집 떠나 있는 시간
사흘, 이레, 아흐레 중 가장 짧은
냉각의 시간
투명과 불투명이 함께 공존하는
폭풍 잦아들고
슬그머니 고요가 기어드는 시간
잠시 유체 이탈로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를 가늠해 본
칼로 물 베어본
찻잔 속
태풍.

 


19. 끝물오이

다 마른 줄거리에 오이 한 개 달려있다
마지막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이다 
끝끝내,
포기해선 안 될  
희망의 단서이다

 


20. 촛불

약속을 어루만지고 있다
손등이 붓도록

스스로 몸을 낮추고
때론 빳빳이 세우기도 하면서

그리움과 기다림 사이
맑은 눈동자

조금 흔들릴 뿐
까만 속눈썹이 조금 흔들릴 뿐

21. 과메기   /   이석현
뼛속 깊이 차가운 해풍이
들어왔다 나간다.

살 속 깊이 얼음 꽃이
피었다 진다

수 만 마리의 푸른 바다가
얼었다 녹는다.

 


22.

 가루 한 대접에 물 일곱 대접을 부었으니 흥건하다.
물을 너무 많이 부은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부지런히 주걱으로 저었다.
시간이 흐르자 잘 익은 도토리 빛깔로 아주 적당하게 어우러지기 시작하더니
여기저기에서 푸득푸득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한꺼번에 분출되는 화산 같았다. 불을 낮추고 조금 더 저으면서 끓이다가 불을 껐다.
널찍한 큰 그릇에 펄펄 끓던 묵을 부어 푸푸 토해내던 열기를 서늘하게 진정시킨다.
마침내 반짝반짝 윤기 흐르는 묵이 되었다. 고통을 이겨낸 자의 자태가 이런 것일까.
 묵은 나에게 가만히 일러주었다.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인내는 다르지 않다고.
인연은 씨줄과 날줄 같다고. 산이 물을 품어 더 깊고 큰 산을 이루듯이
사람도 함께 어우러져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수필 <묵 이야기> 중에서-

 

23. 칸나, 그 붉은

단두대 날선 칼 위
목 드리우고 핀 꽃

어두움 불사르던
혁명의 함성들이

기꺼이 바치고 떠난, 목이 쉰 핏자국들

 


24. 보온병

품었을 뿐
애써 몸을 바꾸진 않았어

차가운 건 차갑게
뜨거운 건 뜨겁게

되잖아,
둥근 우주 속

바깥에선
모르는

 


25. 네 이름을 알았어

산책시간에
너를 처음 만났지.

네 앞에 앉아
예쁜 꽃 안녕하니
선생님이
얜 민들레야
일러주었어

네 이름을 
알고 나니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마다
네가 있지 뭐야.

 

26. 한숨

벽에 갇힌 한숨은
묵직한 향을 뿜어내고
난 그 지독한 향의 노예가 된다

멀리 타는 목마름 같은 벽이 보인다
긴 한숨이 다가온다

 

27. 녹차

산봉우리로 밀려온 바다의 노래
마디게 자란 차나무 몸으로 스민다
곡우 전에 내민 여린 잎
찌고 덖고 말려 우려낸 몸으로
맑은 입을 연다

그저 찻물이 아니다
꽃이었고
바람이었고
파도였고
햇살이었고
눈물이었다

아,
나무의 혼이었다
붉은 목구멍을 넘어가는 도반이여!

 

28. 첫사랑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는 늘 열다섯 살

수평선처럼 상큼하게 휜 니 눈썹 끝에 매달려
파랑 멀미를 하는 물잠자리다

 

 

29. 국화빵이 피는 계절

국화축제 한창인 광장 한 켠
국화빵가게가 피어 있다 사람들은
노랗고 빨간 꽃의 난무 속을 걸어
국경의 초소 같은 남루한 가게 앞에 도착한다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의 어느 나라처럼
1톤 트럭 짐칸은 붐비는 천막
밀가루반죽을 채워 넣고 그 위에
꽃술 같은 팥 앙금을 살짝 포개면
화분마다 둥근 압화들이 피어난다
우리는 모두 계절의 국경을 넘어가는
초조한 시간여행자
출입증 같은 빵 하나씩 받아들고
사람들은 조금씩 겨울이 되는 걸까
호호, 뜨거운 김을 삼키며
더러는 서로의 표정을 곁눈질하며
천둥과 비바람과 뙤약볕으로 속이 꽉 찬,
둥근 빵 속으로 계절의 난민 몇 걸어가고 있다

 


30. 꽃무릇 1

9부 능선에서                 
끓어오른 마음  
붉은 파열음
   
피어야 꽃                 
끓어야 사랑

 


31. 동빈교에서

비닐 말은 속곳
송림 모래 속 묻어둔 채
파도 타고 조개 줍다
껍질 잃은 번데기로
아랫도리 달랑대며 돌아오던 길

시험선 내린 아버지 찾아간 신선옥
분 냄새 좋은 색시가 비벼주던
까무 달코롬한 자장면 면발보다
등판에 엄마손이 더 굵게 새겨지던 곳

옛날은 숙성된 비늘 내음 같이 아련한데
청어떼 들물의 전설 찾아
바다로 가는 어부의 손길 부산하다

머무는 듯 하지만
쉼없이 제 몸 부딪혀 소리하는 물결로
동해의 검푸른 고기들 마중가리라
북해의 홍연어도 불러 오리라